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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 우에무라 다카시 지음, 길윤형 옮김/푸른역사 |
시작은 하나의 녹음 테이프였다
1991년 8월 10일, 서울에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실. 윤정옥 정대협 공동대표 등 2명의 멤버가 한 조선인 ‘위안부’의 증언 녹음 테이프를 재생해 저자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그들이 ‘위안부’를 상대로 진행한 청취조사 내용을 설명해줬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통해 여성은 “어떻게든 잊고 살자고 생각했지만, 잊을 수가 없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라며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저자는 서둘러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으로 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기사에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 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 / 한국 단체가 청취조사〉라는 제목을 붙여 다음날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면 톱으로 실었다. 기사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서울 10일=우에무라 다카시]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돼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한 ‘조선인 종군위안부’ 가운데 1명이 서울 시내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윤정옥 공동대표, 16단체 약 30만 회원)가 (증언)청취 작업을 시작했다. 동 협의회는 10일 여성의 사연을 녹음한 테이프를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공개했다. 테이프 안의 여성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난 끝에 겨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니시오카 교수는 월간 《문예춘추文藝春秋》 1992년 4월호에 우에무라가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등에 대해 “중대한 사실 오인”이 있다며 저자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2014년 1월 《주간문춘》(2014년 2월 6일호, 발매는 1월 30일)의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기사에서 다시 저자를 ‘날조 기자’라고 공격한다.
우에무라 기자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됐다’고 기사에 쓰고 있지만, 정신대라는 것은 군수공장 등에 근로동원된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게다가 이때 신분을 밝힌 여성은 (일본 법정에 제출한) 소장에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적고 있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 우에무라 씨는 그런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강제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자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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