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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현순 -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숨은 주역

by 글쓰남 201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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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순 - 10점
고정휴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역사공간
3.1운동, 한국의 독립에 대한 해외 홍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지원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써온 독립운동가 현순.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는 3.1운동 후의 임시정부 발족.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 활약했다. 전후 한국,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기를 바랐던 열렬한 애국자 현순은 그의 업적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해방 전후 현순과 그 가족들의 급진주의적 사상과 활동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 전체가 부정 또는 왜곡되어온 탓이 크다.

현순은 평생 분투하며 살았지만 차별과 소외, 배제와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에서 역관 집안 출신에게 가해지던 차별적 시선은 미국에서의 인종차별로 이어졌다. 정치적인 소외와 배제는 더 직접적이었다.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내무차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구미위원부의 위원장 대리로 한국의 완전 독립을 미국 정부에 요구하려던 중요한 시점에 해임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기에는 중한민중동맹단과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반대자,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일본의 패전 후 현순은 미 육군 중부태평양 사령관에게 귀국 청원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선풍이 몰아쳤고, 현순의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미국 정부와 의회로부터 추방 위협에 시달렸다. 그의 큰딸은 북한으로 입국했으나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 시기 현순은 외로움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누구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1968년 8월 11일, 현순은 “죽기 전에 꼭 통일된 내 나라를 찾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안은 채 만 89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한 양로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순의 유해는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다. 3·1운동 직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조국 독립을 위하여 세계를 한 바퀴 돌며 분투했던 현순은 해방이 된 지 30년이 지나서야 해외 애국선열 유해 봉환식을 거쳐 비로소 조국의 땅에서 잠들 수 있었다.

그 후 또 40년이 지났지만, 현순은 아직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현순이 그의 생전에 많은 글(각종 메모와 일기, 여행기, 자서전, 한시, 희곡 등)을 남겨두었고, 자신의 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전보문, 외교문서, 성명서, 신문기사 등)을 모아놓았고, 1930년대에 쓴 <현순자사(玄楯自史)> 등의 자서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다룬 전기류와 평전은 출간된 바 없다. 그의 후손이 발간한 자료집과 사진첩 등이 나와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된 수준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묻혀 있던 현순의 자취를 되짚어보면서, 조국의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기여한 숨은 영웅, 현순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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