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도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by 글쓰남 2018. 6. 4.
반응형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10점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필로소픽

마크 릴라는 진보가 패배한 주된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루스벨트부터 레이건까지 20세기 미국 정치 체제의 변화를 살핀다. 그는 미국 정치사를 뉴딜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루스벨트 통치 체제(dispensations), 1980년대 이후의 레이건 통치 체제로 구분한다. 루스벨트 체제의 민주당은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나라를 그렸고, "연대, 기회, 공적 의무"를 표어로 내세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유럽의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받은 미국 진보세력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정체성 정치를 내세우며 점차 공동체의 가치에서 멀어졌다.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 개인의 특정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체성 정치는 소외받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원래는 민중 계층을 위한 것이었던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결과 전통적 진보에서 중추 역할을 하던 남성 노동자 계급이 이탈하게 된다. 이즈음 향후 미국 정치를 40년간 지배할 레이건 체제가 등장한다. 레이건은 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자립적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레이건의 비전은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이후 클린턴, 오바마로 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했지만, 진보 진영은 레이건의 반정치적 비전을 넘어서는 경쟁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



소수자를 돕는 유일한 길을 막는 소수파 진보의 사이비정치

레이건의 이념이 지배하는 동안 민주당은 그에 상응하는 확신을 주는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너'와 '나'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더 작은' 진보를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왔다. 다수파를 만들어서 선거 승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노력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사고인데도 정체성 정치는 다수파 진보가 아닌 소수파 진보를 지향한다. 소수파 진보는 자신이 타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차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그들에게 진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다.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법령을 바꾸어 현실적 변화를 꾀하는 정당 정치를 불신하고, 대학의 워크숍과 세미나, 항의 시위와 퍼포먼스 같은 운동 정치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사이비정치라고 마크 릴라는 비판한다. 소수자의 권익을 진정으로 향상시키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 승리해서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제도권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클린턴과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던 민주당 집권 시절에도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는 지방정부에서 연방 법원까지 현실 정치 영역은 공화당에게 빼앗겼다. 극우적 세력이 점령한 일부 지방정부는 연방법과 헌법적 보호장치조차 사문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이런 정치 혐오적인 소수파 진보로는 진보의 가치와 신념을 사회에서 실현하지 못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