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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고아 열차 -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Orphan Train)

by 글쓰남 2016.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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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열차 - 10점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문학동네
어린 시절 세상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두 여자,
바닷가 낡은 다락방에서 서로의 삶을 만나다

“나는 버려지고 잊혀 내 처지보다 더 비참한 집안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_비비언
“어느 누구한테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_몰리

퍼노브스콧 인디언인 열일곱 살 소녀 몰리는 매일 아침 얼굴에 새하얗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두덩을 새까맣고 칠하고 체인 귀걸이와 코걸이를 주렁주렁 매다는 것으로 섬세하고 여린 내면을 꽁꽁 감춘 채 살아간다. 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아빠를 잃고 엄마마저 교도소에 간 뒤 9년간 열 곳이 넘는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배운 건, 누구에게도 어떤 기대도 해서는 안 된다는 세상의 차가운 진실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동떨어져 홀로 독서를 즐기는 몰리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낡은 『제인 에어』 한 권을 훔치다가 적발되어 소년원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학교에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호감을 보였던 현재의 남자친구 잭은 자신의 어머니가 일하는 대저택에서 노부인의 다락방 정리를 돕는 일로 사회봉사 활동 시간을 채우라고 제안한다. 소년원이냐, 고루한 노부인과 보내는 50시간이냐. 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후자를 택한다. 



그 다락방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리는 알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널린 뿌옇게 먼지가 앉은 궤짝과 상자들 속에는 한 사람의 91년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 역사의 주인인 비비언의 머릿속에서조차 세월에 마모되어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이 두 사람이 함께 물건들을 정리하는 동안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그리고 마침 와바나키 인디언의 ‘육로 이동’에 관한 몰리의 미국사 수업 과제와 겹치면서, 다락방 정리는 일종의 구술사 인터뷰로 옮아간다. “몰리는 천조각을 이어서 누비이불을 만들듯 그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한데 엮어서, 각자 떨어져 있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도안을 만든다.” 비비언은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겨야 했을 때,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두고 떠났을까? 또 몰리는? 만약 당신이라면,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두고 떠나겠는가.

“나는 도망친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갈색 여행가방, 번 씨의 집에서 만든 원피스 세 벌, 손가락 없는 장갑과 갈아입을 팬티와 감색 스웨터, 교과서와 연필, 라슨 선생님이 쓰라고 주신 작문 연습장. 다행히 패니가 준 바느질 꾸러미는 외투 안주머니에 들어 있다. 내가 도울 방법이 없었고 사랑하지도 않았던 네 아이를 두고 떠난다. 두 번 다시 겪을 리 없을, 비천하고 불결한 곳을 등지고 떠난다. 내 어린 시절의 마지막 한 조각을, 거친 널빤지가 깔린 그 거실 바닥에 두고 떠난다.” _비비언

“그녀는 등딱지를 짊어지고 다니는 거북이다. 비틀거리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제인 에어다. 카누의 무게에 짓눌린 퍼노브스콧족이다. 그녀의 짐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녀의 전 재산이 들어 있으니까.” _몰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한 이민 러시부터 대공황기와 일본 가미카제 전투기의 펄 하버 폭격에 이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까지, 비비언의 삶은 역사의 아픈 구석들을 통과해왔다. 그녀가 원래 이름인 니브로 불렸을 때, 그녀도 수많은 아일랜드인처럼 증기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왔다. 거의 전 재산을 뱃삯으로 지불하고 제대로 된 기반조차 없이 시작한 타향살이는 약속된 장밋빛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둡고 비좁고 더러운 아파트에서 여섯 식구가 복닥거리는 삶, 알코올중독 아빠와 우울증을 앓는 엄마 대신 어린 두 남동생과 젖먹이 아기까지 건사해야 하는 고된 하루하루.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나 소중한 일상이었는지 비비언은 몰랐다. 그 모두를 잃기 전까지는. 
1929년 어느 밤, 집에 불이 나 아빠와 두 남동생이 죽고 엄마와 아기 메이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는 상태에서 아홉 살 비비언은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시카고를 거쳐 미네소타로 향하는 ‘고아 열차’에 오른다. 그들은 “허섭스레기처럼, 너벅선에 실린 쓰레기처럼 뉴욕의 길거리에서 수거돼 최대한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장밋빛 미래는 없었다. 학교도 보내주지 않고 현관 복도에서 재우며 삯도 없이 바느질 일을 시키는 번 부부의 집, 눈보라가 그대로 들이치는 숲속 판잣집에서 다람쥐 고기로 끼니를 해결하며 네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그로트 부부의 집을 거치며 비비언은 점차 심신이 피폐해져간다. 
그러나 악의로 가득해 보이는 세상에도 선한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이 인생의 고비마다 비비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장갑을 떠준 패니, 생일을 챙겨주고 책을 선물해준 라슨 선생님,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간호해준 머피 부인, 딸처럼 챙겨준 퀼트 모임의 부인들…… 단단하고 온후한 여성들의 연대는 비비언의 삶, 그리고 이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자 밑바탕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비비언 자신이 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밂으로써 연대의 고리가 이어지고 연장된다. 『고아 열차』를 읽은 수백만 독자들이 공감했듯, 이 단단한 여성 캐릭터들의 매력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울림이 있다. 클라인은 현미경과 망원경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두 여성의 삶과 마음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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