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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사라진 소녀들의 숲

by 글쓰남 202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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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 10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미디어창비

1426년 조선,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졌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서사,
그 끝에 다다른 뼈 아픈 역사의 진실

1426년 조선에 남아 있던 공녀 제도라는 묵직한 이야기 배경을 가졌음에도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의 묘미를 한껏 발휘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민환이, 민매월 자매다. 자매의 아버지 민제우는 이름 높은 수사관으로서 한 마을에서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자매의 고향인 제주로 떠났지만 곧 실종된다. 소설은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한 민매월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단서는 아버지가 남긴 60권의 수사 일지, 조력자는 뜻하지 않은 이별로 사이가 틀어져 버린 제주에 남은 동생 민매월이다. 제주로 향하는 배 안에서부터 진행되는 소설의 전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숨겨진 실종 사건 증인들, 민씨 자매의 탐문과 용의자들의 치밀한 알리바이, 아버지가 남긴 수사 일지와 엇갈리는 단서, 각자의 사정 때문에 숨겨왔던 진실 들이 얽히고설켜 한순간도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 사이사이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나선 주인공 민환이, 민매월 자매의 애증관계, 그 속에 감쳐진 안타까운 가족사가 독자들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진실은 어느 한 개인의 사연이 아니라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로 가슴에 남는다.
소설의 모티프가 된 것은 고려 시대 학자였던 이곡(1298~1351)이 공녀 제도를 폐지해달라고 원나라 황제에게 쓴 실제 편지였다. 작가는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참담한 일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 관심”을 갖고 “이 여인들을 조명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한국 독자들에게」 9~11면 참조). 이 작품이 돋보이는 점은 ‘이 여인들’에게서 순응하는 삶이 아닌 현실의 작은 틈이라도 있다면 뚫고 나오려는 삶의 자세를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성별이나 신분 같은 한계에 꺾이지 않고 씩씩하게 아버지와 열세 소녀의 자취를 좇는 민환이, 민매월 자매라는 매력적인 주인공부터 그렇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고,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양반가들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조연 격의 인물들 모두 개성적이다.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그려내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뚫고 성격도 취향도 다른 두 주인공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은 역사 미스터리 소설의 새로운 페이지터너 탄생을 알린다.


박제된 역사에 생생한 삶을 투영하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환상의 세계
거꾸로 한국에 도착한 K-스토리의 현재

이 소설이 해외에서 먼저 각광받은 이유는 한국사의 특별한 한 사건을 다루는 것을 넘어, 두 주인공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해가며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구원하는 성장 서사, 숨죽여 지내야 했던 약자들의 목소리를 크게 들려주는 작가의 의도에 동시대인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지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민환이, 민매월 자매다. 그리고 그들을 도운 건 비슷한 나이의 또 다른 여성들이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수사 일지를 전한 복선이는 물론이고, 몸과 마음의 상처는 깊지만 옳은 일을 하고자 가까스로 용기를 낸 가희,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합리화되는 이상한 현실에 뒤늦게 눈을 뜬 채원 등 어리고 힘없는 그들은 민씨 자매의 치열함에 가장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인다. 실종 사건의 진실에 다다른 자매가 “희생될 사람과 희생되면 안 될 사람을 누가 결정하”(393면)는지 반문하고, “당신 같은 괴물들 때문에 여자로 태어난 게 저주가 되었”(394면)다며 절규하는 목소리에, 가부장제하에서 희미해진 존재들이 역사 밖으로 뛰어나온다.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환상의 세계”에서는 당대인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제도가 역사책에서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책 밖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의 끊임없는 저항이 결과임을 알려준다.
K-스토리는 이제 한국에서 해외로 나아가는 단계를 넘어, 해외 현지에서 자생하는 형태로까지 확장해가고 있다. 영상과 소설 『파친코』의 인기가 최근 드러난 현상이라면 허주은의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이미 그 기저에서 확실한 영역을 차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낯선 나라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우리 시대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면 전세계 독자들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역사 소설이라면 으레 진중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댕기 머리 조선 탐정이 펼치는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서 역사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600여 년 전 제주의 푸른 바다를 건너, 시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작품이 우리 곁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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