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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by 글쓰남 2016.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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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10점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열린책들            



넋을 빼놓는다. 오늘날의 중국 정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

앤 애플바움, 2004년 퓰리처상 수상자


중화 인민 공화국 선포, 대약진 운동, 그리고 문화 대혁명….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긴 여정, <인민 3부작>

그 첫 번째 이야기, <해방의 비극> 출간!


중국 현대사를 재정립하다


영국과 홍콩에서 중국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해 온 프랑크 디쾨터의 책이다. 현재까지 출간된 그의 10여 권 저서들은 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시각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중 <인민 3부작>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중심에 두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와 사건 들을 되짚는 연작 기획이다. 디쾨터는 인민 3부작 중 <마오의 대기근>으로 이미 2011년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했고, <해방의 비극>으로 2014년 오웰 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름으로써, 학자와 논픽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에서, 중국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그 작업을 위해 디쾨터가 의지하는 것은 최근에서야 공개된 비밀문서와 증언 등 수많은 기록 자료다. 비밀경찰의 보고서에서부터 수정되지 않은 지도부의 연설문, 사상 개조 운동에서 발췌된 자백서, 농촌 반란을 둘러싼 실태 조사서, 대공포 시대의 희생자들에 관한 통계 자료, 공장과 소규모 작업장의 근로 환경 조사서, 일반인들이 제출한 항의서 등, 지금까지 기밀로 다뤄졌던 수백 개의 문건들이 이 책을 위해 낱낱이 파헤쳐졌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현장감과 탄탄한 역사적 근거는 그동안 부당하게 묵살되어 왔던 <해방>의 실제 현장을 고스란히 재연해 낸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의 10여 년은, 국공 내전 이후 전개되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다. 이 책은 치밀한 기록 연구와 포괄적인 시각을 통해 21세기 가장 강력한 정권들 중 하나인 중국의 토대가 마련된 초기 중화 인민 공화국의 민낯을 파헤치는 역사적 프리퀄이다.


중국 인민은 해방되었는가


디쾨터의 주장은 명확하다. 공산당이 거둔 국공 내전에서의 승리는 중국 인민들의 해방과 무관했다. 애초에 당시 중국 인민들의 절대 다수는 새로운 정부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도, 완강한 반대자도 아니었다. 대부분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고, 따라서 생활인으로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다만 오랜 침략과 내전을 겪은 터라 안도와 희망,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전쟁의 종식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이념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행태는 20세기 최악의 폭정일 뿐이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폭력 앞에 인민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공산당 집권 초기 10년 동안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담한 현실을 지근거리에서 목도하거나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가? 종전 이후 중국 사회는 여러 계급 범주로 나뉘었다. 그중 지주, 부유한 농민, 자본가들은 철저하게 핍박받았다. 공산당 이념에 반한다는 것이 근거였고, 반혁명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지주로 몰린 사람들의 형편은 실상 이웃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처형에는 조잡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달렸고, 임의로 죄인을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중앙당에서 내려진 할당량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역 지도부는 할당량을 넘겨 중앙당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했고, 이웃 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51년 4월 부유했던 지역인 옌신 현에서는 중학생 100여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열 살 소년은 들보에 묶여 매달린 채 매질을 당했고, 여덟 살 소년은 십자가에 묶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섯 살의 아이가 첩보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목숨을 잃는 소년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고문 끝에 죽거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혹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공산당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대공포 시대가 유지되고 더욱 악랄해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뿐이었다. 지주, 부유한 농민, 반동분자, 범죄자라는 낙인은 대대로 계승되었다. 자식들에게 박해와 차별이 대물림되었다. 그들은 학교 교사에게 지목되어 따돌림을 받았다. 청년단 단원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성인들은 정치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최소 300회 이상 비판 대회에 참석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이들은 공산당의 편에 서지 않을 경우 평생을 계급 투쟁의 전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점점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이웃과의 왕래를 끊고, 삶을 최대한 단조롭게 살았다. 죽의 장막이 쳐지고 외국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이 시작되자 중국 인민들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5000만이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71만 명의 인민들이 이 시기에 처형되었다. 디쾨터는 반동분자들에 대한 보고 내용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숙청 등 모든 것을 감안하면 처형된 사람들의 수가 200만 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어림한다. 인구 1,000명 당 3.6명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 과연 인민의 해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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