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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임을 위한 행진 - 윤한봉 전기

by 글쓰남 2017.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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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 - 10점
황광우 지음/오월의봄

순진한 ‘광주 촌놈’이 5월 광주민중항쟁의 ‘수괴’가 되기까지 


윤한봉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소년 윤한봉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했던 효자 아들이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돌연 운동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날은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통해 전해 들은 날이었다. “오늘부터 공부는 끝이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결심을 굳힌 윤한봉은 그날로 공부하던 전공 서적을 찢어버렸다. 그 후 윤한봉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당하고 인혁당 사건으로 무고한 젊은이들이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을 목도하며 냉정하고 엄격한 투사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투사들과 달랐다. 선배들에게 교육받고, 책을 읽으며 얻은 지식으로 움직이는 이념형 운동가가 아니라 그가 직접 본 대로 느낀 대로 움직이는 실사구시형 운동가였다. 고구마 전량수매 문제를 놓고 농민들과 정부 간의 갈등이 벌어졌던 ‘함평농민싸움’이나 ‘추곡수매가 투쟁’ 등을 몸소 체험하며 윤한봉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운동을 꿈꿨다. 그래서 그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과 같은 전국 단위의 지하조직에도 가입하지 않고 광주지역 내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모두가 ‘노동운동’을 교과서의 정답처럼 말하던 때였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고 느낀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김근태 씨가 청년운동을 시작한 시점이 1983년이었다. 윤한봉은 이미 1970년대부터 광주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으로의 망명, 작은 동양 식품점 점원에서 한인 단체의 지도자가 되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광주 운동권은 서울 다음으로 영향력이 가장 컸다. 그 핵심에 윤한봉이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터지자마자 윤한봉이 ‘반란의 수괴자’로 지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잡히면 꼼짝없이 죽을 것이니 도망쳐야 한다’는 가족과 지인들의 말에 서울에서 잠시 도피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뒤 윤한봉은 한동안 신분을 숨긴 채 작은 동양 식품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윤한봉은 5월의 그날에 동료들을 버리고 왔다는 사실과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광주의 원혼들을 잊지 말자. 부끄러움 없이 살자. 조국에 돌아갈 때 떳떳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동하자.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갈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동하자. 항시 광주의 존엄을 지키자”고 다짐하며 미국 땅에서 새로이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윤한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어 5·18광주민중항쟁의 부상자와 유가족들에게 기금을 모아 송금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 곳곳에 ‘마당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애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마당집을 ‘민족학교’라 이름 붙이고 그곳을 미국에 있는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의 뿌리에 대해 가르치고 민족문화를 보급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이후 윤한봉은 미국 전역에 ‘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세웠다. 그곳에서 한청련 회원들은 함께 공부하고 각종 수익사업을 통해 기금을 모아 한인 민권의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민청련이 자리를 잡아가자 윤한봉은 더 큰 꿈을 꾸었다. 윤한봉은 타민족과 연대해 공동투쟁해서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로 돕는 ‘국제연대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로 보고 세계적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벌인 일이 ‘재한 핵무기 반대 서명운동’과 ‘국제평화대행진’이었다. 윤한봉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국제평화대행진’은 19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각국 행사단이 축전이 끝난 뒤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하는 것이었다. 몇 달간의 준비 끝에 시작된 7일간의 행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엄청난 행사에도 윤한봉은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의 평소 소신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뒤에 숨어 지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윤한봉은 어느덧 광주에서 후배들의 사랑을 받던 선배를 넘어 미국에서 교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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