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기 히로시 지음, 박현석 옮김/사과나무 |
사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한다!
<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의 저자 세기 히로시는 33년 경력 엘리트 판사 출신으로 전작(前作) <절망의 재판소>를 통해 자신이 몸담았던 일본 사법부의 치부를 낱낱이 밝혀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그 후속작인 이 책에서는 재판관에 의해 진행되는 암울한 재판 현실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며 강력한 사법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일본의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우리나라의 법원행정처)이 법관의 독립성을 무시한 채 인사권을 무기로 상명하달로써 재판관을 통제하는 행태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 법관들이라면 차마 쓰지 못했을 이 책의 내용이 우리나라 사법개혁에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재판관은 어떻게 판단을 내리나?―병아리 암수 감별법과 다름없는 재판관의 판단
병아리 암수 감별사들이 감별 기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논리적인 검증조차 어렵다고 한다. 즉, 직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복잡하지만 재판관의 판단 과정을 되짚어보면 재판관 역시 종합적 직감에 바탕을 두고 판단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재판관은 주장 ․ 증거를 종합해서 얻은 직감으로 결론을 내린 뒤, 사실인정과 법률론에 적용시키는 과정은 판단을 뒷받침하는 검증,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는 곧 재판관의 능력, 통찰력, 식견과 비전, 겸허함, 인권의식, 민주적 감각 등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원고, 피고, 피의자, 피고인 그리고 피해자 등등의 다양한 소송 관계자 그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 ‘더 없이 소중함’이 재판관에 따라서 암수(유죄 ․ 무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재판의 현실이다.
재판관은 정의(正義)의 자동판매기인가?
많은 사람들이(변호사들 중에도) 재판관은 주장 ․ 증거를 입력하면 당연히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기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재판관의 가치관, 인격, 인간성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며, 법률적인 논리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명으로 사용될 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나쁜’ 재판관은 스스로를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기계, 즉 ‘부정의(不正義)의 자동판매기’로 꾸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문제가 많은 판결을 내리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은 재판관 ․ 재판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일본의 사법부는 겉으로는 재판의 독립성을 내세우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무총국(우리나라의 법원행정처)을 통해 재판관과 재판을 통제하고 있다. 사무총국이 주최하는 ‘재판관 협의회’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학자가 진행하는 연구회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명칭은 협의회이지만 그 실태는 ‘상의하달, 상명하복 회의, 사무총국의 의향 관철을 위한 개입회에’에 가깝다. 협의회에서 논의될 문제는 사무총국이 결정해 ‘각본대로’ 제출받는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간 뒤 ‘사무총국의 견해’를 얘기하는 순간 일제히 연필이 움직인다. 그 모습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의 회의를 연상시킨다. 협의 결과를 정리한 사무총국의 ‘국(局)의 견해’는 전국의 재판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이후 협의회에서 논의된 사건과 같은 유형의 판결들은 ‘국의 견해’와 취지를 같이하는 것은 물론, 개중에는 표현까지 똑같은 ‘베끼기 판결’까지 존재한다. 이처럼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은 은밀하고 묵시적인 방법으로 재판관 ․ 재판을 통제하는 것이다.
판결문에 드러난 억지스런 수사학(修辭學)
재판관은 자신의 감각이나 가치관에 따라 직감적으로 결정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판결의 수사학(修辭學)을 이용한다. 문제가 많은 판단의 경우에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그러한 판단에는 처음 억지스럽게 특정 방향으로 결론을 내린 뒤, 오로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수사학이 사용된다. 판결의 수사학은 난해한 용어를 쓰고, 또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률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을 속이거나, 법해석의 연역적 논리에 익숙한 법률가를 설득하기에 의외로 효과적이다.
판결에는 크게 두 가지 수사학이 있는데 ‘은폐형’과 ‘잘라내기형’ 판결이다. ‘은폐형’ 수사학은 취약한 논리를 호도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법률적 ‘언어’를 몇 번이고 거듭 되풀이하는 것이다. 반대로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거나, 혹은 불리한 부분을 생략하는 것이 ‘잘라내기형’ 수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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