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허경 지음, 대안연구공동체 기획/길밖의길 |
“2016년의 대한민국 사회는 거대한 임계점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까지 합리적이었고 용납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러한 현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과거의 틀, 과거의 합리성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이제까지 100여 년간 우리의 인식을 지배해 왔던 서구근대 인식론의 파산을 증명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현상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나는 이러한 ‘이해할 수 없음’이야말로 오히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합리성의 도래를 알리는 ‘희망의 근거’임을 말하고자 한다.” - 저자의 말 -
산업화와 민주화 성공으로 헬조선이 되었다고?
최근 들어 ‘헬조선’이라는 담론이 유행이다. 이 책은 ‘왜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인식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대한민국이 헬조선인 이유는 많다. 지금 인터넷에는 ‘대한민국이 헬조선인 60가지 이유’ 등이 떠다니지만, 그 이유는 500가지 1000가지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그렇게 나쁜 것들만 있을까?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래 잘 살았던 나라를 제외한다면 이른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헬조선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우리의 눈이 너무 높아져서, 고생을 덜해서? 대한민국이 실제로 헬조선이라서? 아니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는 세력의 악의에 찬 폄하?
저자는 이런 물음들을 하나하나 검토한 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는다.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더 이상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016년 한국은 참으로 ‘다이나믹 코리아’다. 현재 한국사회는 광우병, 세월호, 옥시를 넘어 또 다른 지옥도를 그려나간다. 지난 5월에는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한 정신분력 병력이 있는 한 남성에 의해 이유도 없이 피살됐고,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고치던 20대가 어처구니없이 숨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 같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사건들이 새로운 건 아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이런 류의 사건들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 사태에서 국민들이 보여준 반응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서 비롯된 광우병 파동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전 국민적인 이슈로 발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옥시 사태나 강남역 살인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 같으면 불운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을 일들이 전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합리성의 기준 변화… 진리가 적이다
저자는 그 이유로 합리성의 기본적인 인식 틀이 바뀐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덕성과 합리성 자체가 시대와 공간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합리성이나 도덕성은 없다. 그 전에는 별일 아니던 세월호와 옥시, 강남역 등의 사태가 이젠 이슈가 된 이유는 사회적 약자와 희생자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 있다. 담론의 중심이 가해자에서 피해자 로, 통치자에서 피통치자로 이동한 것이다.
그럼 새로운 도덕성, 합리성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내가 나름의 도덕성, 합리성을 구성하듯이 각각의 사람들은 각각의 합리성을 구성한다. 너와 나 각자의 합리성, 도덕성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는 일반화해 미리 규정할 수 없으며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니 대화하는 과정에서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일방적인 확신, 혹은 독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판단 원칙은 간명하다. “나의 일은 내가, 너의 일은 네가, 우리의 일은 우리가 판단하도록 한다.”
요컨대 헬조선이라는 인식도 내 삶의 고유한 영역을 남들이 함부로 재단하거나 심판한 탓에 생겨난 것이다. 지옥이란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곳이다.
희망의 근거-모든 것이 ‘조금’ 달라졌다
칸트에 따르면 혁명이란 삶과 사고의 기본적 기준, 가치가 모두 바뀌는 것이다. 보편성과 합리성에 대한 정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합리성의 형성 과정에 기존의 것과는 다른 ‘약간’의 균열이 생겨났다. 광우병과 세월호와 옥시와 강남역을 지나며 모든 것은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이 ‘조금’, 이 ‘약간’의 변화는 작고 미약하나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지배하는 지층 자체가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이들 증거로 미루어 현재 대한민국은 실로 거대한 인식론적, 정치적 변형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임계점을 넘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이제까지 그럴 수도 있던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진 것이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다! 변형과 위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형의 시대, 위기야말로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연대해 행동한다면, 우리의 합리성으로,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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