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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by 글쓰남 2017.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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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문장과 강렬한 묘사로 삶과 사랑의 양면성을 그려내는 작가 전경린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해변빌라』(자음과모음) 이후 삼 년 만이며, 열두번째 장편소설이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2017년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간 연재되었던 작품을 상당 부분 개고해 묶었다. 휘몰아치는 서사나 스펙터클한 사건 없이 한 인물의 유년과 성장, 그 반추를 함께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나를 만들어가고 또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이 깨달을 수 있다. 전경린 작가의 이번 작품에서 그것은 기억과 관계의 힘, 그리고 그것이 이끈 운명이다. 작가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그 노스탤지어가 이끄는 곳에 어쩌면, 내가 지나온 과거에 어쩌면 이미, 앞으로의 삶을 결정할 거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 10점
전경린 지음/문학동네

“아마도 진짜 이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끝날 것이다.”

―너를 기억하는 나의 이야기.

오로지 내가 너를 기억하는 힘으로 써내려간 우리의 이야기.


“나를 라애라고 부른 사람은 세상에 세 사람 있었다.” 소설의 화자 ‘나애’의 과거를 지배하는 세 사람, 도이, 상, 종려할매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집’에서 살게 된 어린 시절 나애를 지켜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도이, 상과는 유치원 시절, 그들 사이에 ‘문자도 없던 시절’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뒤 아홉 살에 또다른 우연으로 만났다.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우린 거기서 함께했다”고 그 시절을 술회하는 나애. 공고하고 비밀스럽고 무구하고 강렬한 유년의 추억이다. 종려할매는 ‘병원집’의 별채에 기거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인물. 나애의 버팀목이 되어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풍요보다는 결핍이, 꿈보다는 녹록치 않은 현실이 삶을 지배하던 1970년대의 풍경 속 그 추억은 반짝 빛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생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불운 모두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상은 폭력을 쓰는 세계로, 도이는 폭력을 당하는 세계로 멀어져갔다. 종려할매와는 작별 인사도 못한 채 헤어져버렸다. 끝내 상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도이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외려 비로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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