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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by 글쓰남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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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 10점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창비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리베카 솔닛 첫 회고록 출간!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원제 Recollections of My Nonexistence)이 출간되었다. ‘맨스플레인’ 현상을 비판하며 단숨에 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로 떠오른 솔닛의 첫 회고록으로,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가인 솔닛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분투한 기록을 사적인 세계와 정치적 세계를 넘나드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로 담았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솔닛은 집을 떠난 19세부터 지난 40여년을 되돌아본다. 지금은 전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그도 젊었을 때는 스스로를 세상에 없는 ‘비존재’(nonexistence, 非存在)라 느꼈음을 고백한다. 어리고 불안정했던 그가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서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글을 씀으로써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주고, 집단과 사회의 지배서사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솔닛이 자기 뒤에 오는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이 책은 그를 아껴온 독자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사는 동시대 모두에게 울림을 줄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일,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마주치는 과제다"

1981년, 대학 진학을 앞둔 19살의 리베카 솔닛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후미진 동네의 작은 방을 빌린다. 지금의 그를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때 솔닛에게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원서의 표지에는 앳된 얼굴의 솔닛이 훤히 파인 등을 돌린 채 마치 어딘가로 숨어들려는 듯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 실려 있다. 허리 20인치의 빼빼 마르고 허약한 젊은 여성이었던 20대의 솔닛은 자신의 몸을 실패작이라고 확신해 수치스러워했다. 그에게도 어리고, 가난하고, 걸핏하면 길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남자들에게 뮤즈 혹은 독자로만 취급되고, 어엿한 역사책을 쓰고도 저자로서의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미래가 전혀 약속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결핍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 솔닛은 종종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에 없다고, 즉 ‘비존재’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25년을 살게 되는 작고 환한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을 천천히 만들어간다. 그 변화를 보는 것은 이 회고록의 백미다. 20대의 솔닛은 펑크록에 빠져 가죽 재킷을 걸치고 검은 아이라이너를 칠하고 거리를 쏘다니는 몽상가이자 부적응자였다. 열성적으로 책을 읽고 저널리즘 대학원에 다니면서 스트레이트 보도 글쓰기를 배웠지만 형용사 없이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술관 연구원으로 일하며 현대미술의 주변부를 익히고 후에는 미술비평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집세를 낸다. 30대의 솔닛은 작가로 데뷔하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학계 및 출판계와 맞선다. 웨이트 운동을 배워 몸을 단련하고, 모터사이클을 타며 짜릿함을 느끼고, 픽업트럭을 몰고 광활한 서부로 떠나 몇주씩 야영을 하며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쓰고 또 쓴다.
솔닛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 책은 회고록이면서 회고록이 아니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보통의 회고록은 개인적으로 어떤 역경을, 가령 끔찍했던 유년기나 중독이나 질병을 극복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 책은 그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비존재라 느끼게 만든 것은 여성을 지우고 사라지게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비존재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개인사를 추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솔닛은 주특기인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보게 하는 서술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오랜 페미니즘 슬로건을 실현해낸다. 갓 성인이 된 솔닛이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성장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단독자의 삶이란 없다는 것, 개인의 삶이 때로는 공동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는 것, 우리를 비존재로 만드는 힘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공동의 회고록을 쓰는 일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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